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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의 강연 전문:W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의 강연 전문 (2008년 초) :내가 외과 전문의가 된 것이 1993년이다. 의과대학을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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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의 강연 전문 (2008년 초) :

내가 외과 전문의가 된 것이 1993년이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딴 뒤,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서 전문의가 된다. 인턴/레지던트와 전문의와의 차이는 군대에서 소위하고 장군하고의 차이 정도 된다. 그래서 레지던트 신분에서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는 순간 그 다음날 부터 식당에 내려가면 밥을 드디어 밥그릇에 담아주기 시작하고, 가운이 폴리에스테르에서 면으로 바뀌는 등 50여 가지가 바뀐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월급이 한 10배쯤 오른다. 그래서 레지던트에서 전문의가 되는 순간 '아~ 이제부터 꽃이 피었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이다.

일단은 취직을 해야 해서 당시 의국으로 들어온 인력요청서를 보니까 몇 군데 병원에서 외과의사가 필요하다고 요청한 상태였다. 아직 젊으니까 종합병원에서 경험을 쌓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큰 병원이 있나 찾기 시작했다. 종합병원급이 대전, 서울, 대구에 1군데씩 3군데가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3군데에 나의 이력서를 보냈다. 이후 회신이 왔는데 대전에서는 당시 외과의사 평균연봉의 세 배를 줄테니까 오라고 했다. 세 배이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혹시나 다른 사람이 채갈 까봐 팩스를 보자마자 바로 전화를 했다. 그러니 그쪽에서 '당신을 애타게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두 번 생각할 것이 없었다. 돈 많이 주고, 나를 간절히 원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에 보따리를 싸서 대전에 내려갔다.

대전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병원 이름을 댔는데 기사가 병원을 몰랐다. 좀 이상했다. 물어 물어 간신히 가보니까 응급실, 외래진료실, 수술실 몇 가지만 완성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골조공사 중이었다. 이유는 인가 받은 날짜에 개원은 해야 하고 공사는 지연되어서 우선 한 개 층의 반만 오픈한 상태였다.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왕 왔으니까 하면서 원장실을 찾았다. 이때 원장님이 말하셨다. "당신이 우리 병원에 온 첫 번째 의사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두 번째 깨달았다. 뭘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외과병동에는 반드시 의사가 3명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 명은 외래보고, 한 명은 수술하고, 한 명은 밤에 응급상황을 대비하면서 쉴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 있으니까 세 사람 몫을 다하고 대신 월급을 3배로 주겠다. 사람을 한 명 더 구하면 월급을 반으로 줄이고 세 명 다 차면 1/3만 받아라." 그냥 돌아서려다가 순간적으로 유혹이 생겼다. 어차피 레지던트때 잠 못자고 일했으니까 레지던트를 1년 유급했다고 생각하고 1년 바짝 일하면 나머지 2년은 놀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3주가 지나니까 죽을 것 같았다. 낮에 외래진료 2~30명 하고, 한숨 돌리려고 하면 수술준비 되었다고 하고, 수술하고 내려오면 환자 30명 기다리고, 마치고 쉴려고 하면 수술 준비되었다고 하고, 남들 퇴근할 해질녘이 되면 응급실에 환자 50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3주 이상 잠을 2시간 이상 연달아 자보질 못했다. 그때 서울의 한 경제연구소에 있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좋은 강연이 있는데 들으러 오지 않겠냐고 말을 했다. 무슨 강연이냐고 묻자 미래의 트렌드에 대해서 프랑스에서 유학을 갖다 온 똑똑한 친구의 강연이라 들어두면 일생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내가 말했다. "대전 시민의 생명이 내 양 어깨에 걸려있다. 지금 경제강연 듣겠다고 병원을 비울 상황이 아니다." 끊으려고 하는데 친구가 또 강조했다. "이 강연을 안 들으면 평생 후회할 거다."

그래도 전화를 끊었는데 일생의 기회라는 등, 평생 후회할 거라는 등의 얘기가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래서 그 다음날 원장실 문을 열고 의학세미나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갸우뚱거리시면서도 거액의 용돈까지 주시며 허락을 해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한 번 풀어주지 않으면 이대로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시간이 생기고 돈이 생기니까 혼자 가기 심심해졌다. 누굴 데려갈까 고민을 했지만 아무리 주위을 돌아봐도 평일 오후에 하는 강연을 같이 들을 멀쩡한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 텍사스주립대에서 MBA 마치고 와서 1년째 백수가 된 친구에게 전화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 하는 무슨 강연이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승낙을 했다.

강연장에 도착하니 박사급 연구원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때 연사가 들어서자 불쾌한 기색이 강연장에 차면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연사의 복장이 황당해서였다. 강연하러 오면서 찢어진 청바지에 무릎이 다 나왔고, UCLA가 적힌 티셔츠에 뉴욕양키스 모자를 쓰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구원들은 자신들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상태에서 시작된 강연이 10분 정도 되니까 뒷줄부터 일어서서 한 명씩 나가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나니까 맨 앞줄만 남고 외부참석자는 우리들뿐이었다. 이유는 강연 내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연주제가 기가 막혔다. 강연의 주제를 적겠다면서 칠판에 ‘WWW’라고 적고 나서는 다짜고짜 하는 말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이 W의 세상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W 안으로 은행도 들어오고 증권사도 들어오고, 이걸로 핵무기도 만들고, 이걸로 전쟁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딱 들으면서 나는 이 친구가 테트리스 게임 만들다 미쳤거나 망상장애 같은 정신질환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연구원들도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하고 다 나간 것이다. 93년도에 이런 얘기를 하면 정신병자이다. 강연이 끝나고 반응들이 황당하니까 연사도 민망해서 머리를 긁으면서 나가는데 아무도 박수 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연구소 역사상 그 전으로도, 그 후로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도 초대한 친구에게 '이따위 강연을 들으려고 대전시민을 팽개치고 내가 여기 앉아있어야 했느냐' 따졌다. 그 친구도 자기도 이럴 줄 몰랐다고 미안해했다. 그때 갑자기 오른쪽에 앉아있던 백수가 박차고 일어서더니만 나보고 빨리 돈 10만원만 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저희들은 저녁 먹고 따로 놀아라, 나는 저 W하고 이야기 좀 하고 가야겠다고 대답을 했다. 강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단다. 말려도 막무가내길래 여비 중 일부를 떼주고 그 길로 따로 헤어져 친구와 저녁 먹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백수는 그 길로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려는 W를 잡았다고 한다. "저는 W를 믿습니다. 저를 W의 세상으로 인도해주십시오." 옥신각신하다 W가 납치되어 간 곳이 마포에 있는 주먹고깃집이었고 새벽 2시까지 풀려나지 못했다고 한다. 백수는 W세상으로 뛰어들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 달라고 끝까지 물고 늘어졌고 결국 W는 이러저런 몇 가지 조언을 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고 후에 들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다음에 문제의 W가 작은 사무실을 하나 내었다. 자본금은 700만원이었다고 한다. 그 회사의 자산가치는 현재 2조 가까이 된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자본금 700만원에서 2조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십수년전에 이러이러한 세상이 될 거라고 한 것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귀에다 대고 얘기해줘도 미쳤다고 믿지 않았던 그 세상이 거짓말처럼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소름이 끼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오천만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천재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백수이다. 그 놈은 나랑 헤어지고 3주쯤 후에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다짜고짜 첫 월급을 전부 빌려달라는 것이다. 사실 백수가 빌려달라는 말은 그냥 달라는 말이 아닌가? 거절했더니 지금 그 돈을 빌려주든지 30년간의 인간관계를 끊든지 선택하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월급에서 최소생계비를 제외하고 모두 빼앗겼다.

백수는 그 돈으로 대구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또 연락을 해왔다. 사업을 도와달라는 얘기였다. 편지를 주고 받는데 필요한 가상주소를 만들라는 것이다. 지금의 전자메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합리적으로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무조건 망한다고 충고했다. 첫째, 너 일년에 편지 몇 통 쓰냐.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지를 안 쓰는데 그게 되겠냐? 둘째, 설령 일년에 세 통 이상 편지를 쓴다고 해도 우표 값이 아까워서 사용 안 할 것이다. 셋째, 편지는 자고로 육필로 써야 한다. 이 사업은 무조건 안 된다. 그랬더니 백수가 말했다. "W가 말씀하시기를.. 모두가 컴퓨터로 편지를 쓰는 날이 온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디를 하나 만들었다.

또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병원에 전용선이 들어왔다. 당시 시범적으로 정부기관과 종합병원에 인터넷 전용선을 놓아준 것이다. 하지만 쓸 데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첫 번째 전자메일이 날아왔다. 동창회 소집메일이었다. 기껏 한다는 짓이 이런 거냐고 생각했는데 수신인이 170명이라는 걸 보고 놀랐다. 그때 전체회신으로 나는 대전에서 의사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디서 뭐하니라고 보냈는데 이틀 만에 무려 70~80명이 답장을 해 온 것이다. 다들 신기해하는 반응이었다. 그 동안 백수가 동창회 명부를 들고 정부기관과 종합병원에 다니는 동창들을 가입시키고 낚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병원 직원들에게 전자메일을 소개했더니 다들 메일놀이에 빠져있느라 병원업무가 마비가 될 정도였다. 병원 전 직원이 가입하는데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대구에서 시작한 전자메일 서비스회사가 일년 반 만에 250만 명의 가입자를 모집했다. 그리고 99년 초에 골드만삭스라는 외국계 투자회사에 600억에 지분을 넘겼다고 한다. 지금은 엄청난 빌딩의 소유주이자 그곳에 입주한 4개 벤처회사의 지분을 소유한 지주사 회장으로 있다. 백수가. 그리고 내 돈은 아직도 갚지 않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상용메일 서비스였다.

나는 그 과정에서 굉장히 가슴이 아팠다.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왜냐하면 친구가 잘 된 게 배 아파서가 아니라 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었는데 왜 백수에게는 인생을 걸고 뛰어들어야 할 복음으로 들리고 나한테는 망상장애를 가진 환자의 기괴한 이야기로 들렸던가? 이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차이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고민을 하던 차에 마침 내가 읽고 있던 책에서 답을 구했다. 제레미 러프킨의 초기 저작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현생 인류가 30만 년 전에 출발을 할 때, 그때 가진 자산은 돌도끼가 유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30만 년이 흐른 지금에서 볼 때 인류가 가진 자산은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다. 30만 년 동안 나고 죽었던 모든 인류가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0.1%의 창의적인 인간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꿈꾸지 못한 것을 꿈꾸고, 여기가 새로운 세상이다 라며 엄한 곳에 깃발을 꽂으면 0.9%의 통찰력과 직관을 갖춘 안목 있는 인간이 그것을 알아보고 거기에 뛰어 들어서 한 배를 타고 등을 밀고 손을 당기며 이뤄낸 1%의 역사다.

그래서 제레미 러프킨은 0.1%의 창의적 인간과 그것을 알아보고 협력하고 함께 문명을 건설한 0.9%의 안목 있는 인간 즉 1%의 인간이 문명을 이끌었고 나머지 99%의 인간을 잉여인간으로 규정했다. 가슴이 뜨끔했다. 잉여인간이란 유기물 즉 섭취와 배설을 반복하며 이산화탄소만을 발생시키는 존재이다. 그래서 항상 0.1%가 새로운 것을 주장하면 0.9%는 함께 그것을 이뤄내고 나머지 99%는 매번 세상 참 좋아졌다. 옛날엔 이렇지 않았는데 참 놀랍군... 이런 얘기를 하면서 따라오고 있다. 그걸 보니 답이 딱 떨어졌다. W는 0.1%였고, 내 친구 백수는 0.9%에 속해있고, 나는 잉여인간이었던 것이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90년대 일어난 이 현상들이 일시적인 현상인지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뒤져보니 구구절절이 제레미 러프킨의 이야기와 일치했다. 대표적인 예로 경제사만 놓고 봐도 한 200년 전에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공작기계의 산업특허 1호는 방적기계이다. 당시 영국에선 양털이 있어도 모직능력이 없어서 네덜란드로 가져가 가공한 후 다시 수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모직물의 가격이 엄청나게 비쌀 때였다. 그래서 기계를 이용해 대량생산한다는 것은 당시로 봤을 때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 기계를 만든 W는 획기적인 것을 개발한 것이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그냥 그런 게 있나 보다 했는데 당시 글래스고우에 첫 공장이 만들어졌을 때 주변 감자밭 주인 중 일부가 이렇게 생각했다. "저 놈은 W다. 저거 세상 뒤집겠다. 산업의 중심이 되겠다. 나도 저기에 뛰어들 수 없을까?” 고민했다. 그때 아무리 기계가 잘 돌아가봐야 양털이 없으면 모직생산이 중단될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천재들의 가장 큰 단점은 좌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장은 지었는데 양털을 어디서 가져올 지 생각을 못한 것이다. 이때 일부 감자밭 주인이 감자밭을 갈아엎고 양목장을 시작했다. 모직생산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양털이 대량으로 필요해지면서 어마어마한 부를 양목장 주인이 가져가게 되었다. 뒤늦게 너도나도 감자밭을 갈아엎고 양목장을 하는 바람에 영국에 감자파동이 일어난다. 감자기근으로 아일랜드 같은 경우는 절반이 죽게 되는데 원인은 바로 모직 때문이다. 그만큼 한 명의 생각이 사회를 뒤집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유럽에 소형내연기관이 만들어지고, 그걸 마차에 붙여 초창기 자동차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걸 자동차로 볼 수는 없었다. 근대적 개념의 자동차를 가장 처음 만든 사람은 헨리 포드이다. 1903년에 헨리 포드가 변속기와 악셀레이터가 달려 있는 자동차라는 것을 만든다. 제작 발표회를 할 때 언론들은 헨리 포드를 조롱했다. 기차보다 더 비싼 생산단가로 만들어졌는데 고작 4명 밖에 못 탄다는 것이다. 헨리 포드는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좌절하고 절망했다. 그는 조롱하는 사람들을 반대로 비웃었는데 대량생산하면 가격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해진 길 밖에 가지 못하는 기차와 달리 자동차는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길로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때 동네 건달 하나가 헨리 포드 얘기를 듣고 무릎을 쳤다. "저 놈은 W다." 자동차를 만들 기술은 없었지만 다행히 정유공장의 지분이 있었고 돈이 있었기에 주유소 사업에 뛰어들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10대도 만들기 전에 8곳에 주유소를 만든 것이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1907년에 대량생산모델 포드T카가 등장하면서 정말 가격이 낮춰졌다. 이후 20년간 온 세상이 자동차로 뒤덮였다. 날건달은 1940년 중반까지 주요 길목을 주유소로 모두 선점하고 미국 전체 주유소의 94%를 독과점해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의 독점을 견디다 못해 만든 법이 바로 공정거래법이다. 이 날건달이 바로 록펠러이다.

또 10여 년이 흘러 1,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지독히 통신이 문제였다. 모든 교신내용을 적군도 함께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주파수 통신을 이용한 무전기를 만들어 대량으로 전장에 납품한 사람이 있었다.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다. 오늘날의 모토로라가 시작된 것이다.

또 10년이 흘러서 트랜지스터가 개발되었다. 사람들이 만들었나 보다 이러고 있을 때 트랜지스터를 이용하여 진공관을 대체하면 전자산업이 발달할 수 있겠다고 믿고 그 당시에 뛰어들었던 0.9%의 기업들이 있었다. 그 회사들은 어마어마한 전자회사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1960년대 기계와 전자문명의 시대로 수십 단계 위로 밀어 올린 주역이 되었다.

또 10년이 흘러서 반도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W가 반도체를 들고 나오자 99%는 비웃었다. 어쩌라고. 그때 반도체로 책상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생겼다. 그것으로 80년대가 컴퓨터의 시대로 한 시대가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90년대. 내가 말했던 그 시대가 돌아왔다. 그러고 보면 매 10년마다 기회가 주어지고 0.1%의 창의적인 인간, 0.9%의 안목 있는 인간, 99%의 잉여인간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도 0.9%가 되고 싶었지만 뭐가 W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문제의 원장님이 나를 불렀다. 들어갔더니 어려운 시절에 고생 많이 했다며 선물을 주신다고 했다. 서랍에서 시커먼 물건을 하나 꺼내 내게 주셨다. 핸드폰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어떤 물건이었냐 하면 로데오 거리에서 페라리 오픈카를 타고 지나가는 것과 똑같은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가입비가 250만원에 기계 값도 그에 준하는 정도로 비쌀 때였다.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그랜저 한 대 값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물건을 원장님이 나에게 주시는 순간, '내가 이 병원에 뼈를 묻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병원입장에서 세금을 낼 돈으로 핸드폰을 사면 경비처리가 가능해 수익을 뒷받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어쨌거나 나는 고마웠다.

그걸 들고 고향 친구들 모임에 가서 자랑을 했다. 다들 신기해했다. 그때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삐삐를 차고 다니지만 그리 멀지 않아서 언젠가 이놈도 싸지면 모두가 다 들고 다니는 시절이 오지 않겠냐." 그런데 친구들이 전부다 하나같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7천원만 내면 삐삐를 주고, 한 달에 2~3천원만 내면 마음대로 쓸 수 있고, 마라도에서도 삐삐가 터지는데 뭐하러 그렇게 큰 걸 들고나니면서 비싼 통화료를 내느냐. 삐삐만 해도 충분하다." 놀랍게도 전원의 반응이 그랬다.

그 순간, 데자뷰 즉 기시감을 느꼈다. '이거 어디서 봤는데...' 예전에 읽었던 헨리 포드 자서전의 이야기를 100년이 지난 다음에 자동차 대신 핸드폰이 되고, 저랑 친구들이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이게 W구나"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으로 달려가서 총무과에 전화했다. 이거 어디서 샀느냐고 물어보니까 한국이동통신 주식회사에서 서비스하고, 기계는 모토로라라는 회사꺼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길로 여기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뛰어들 방법이 없었다. 배운 것이 칼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하다 주식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기업이라서 거래가 되지 않았다. 현재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이 공기업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한국이동통신이 SK에 넘어간다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그곳에 다니던 직원들이 자사주를 명동 사채시장에 내다팔고 있었다. 나는 그때 정확히 이해를 하진 못했지만 왠지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월급만 받으면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으로 한국이동통신 자사주를 샀다. 당시엔 주당 2만원정도였다. 이후 얼마 안 되어서 SK로 넘어가 SK텔레콤이 되어 주식시장에 상장되었는데 무려 6만5천원이었다. '야~ 이거다'라고 생각했으나 W라고 생각해서 올라탔는데 3배 정도라면 W라고 하기 곤란하지 않은가. 그래도 W라고 믿자라고 생각하고 6만원대에도 돈이 생기면 계속 주식을 샀다. 사실은 주식을 샀다기보다는 내가 믿고 있는 W로 가는 티켓이라고 생각하고 샀다. 3-4년이 지나고 99년 말에 '이제 한 시대가 끝났구나' 라고 생각하고 털고 나올 때 1주의 가격이 520만원이었다. 그러니까 처음 2만원에 샀던 주식이 520만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때부터 나를 주신(주식의 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억울했다. 나는 주식투자를 한 것이 아니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지나가던 마지막 W의 버스를 아슬아슬하게 올라타고 다음 정거장에 갈 수 있었던 것뿐이다. 당시 모 방송국에서 의사 한 사람이 이동통신사 주식을 사서 대박 터졌다고 소문을 듣고 와 취재를 요청했는데 한참 거절하다 익명을 보호받는 조건으로 응했다. 하지만 9시 뉴스에 얼굴까지 모두 공개되어 버렸다. 그 시절의 약속은 그런 수준이었다. 그때부터 밖에 불려 나와서 이렇게 얘기하고 다니지만 나는 계속 항변한다. 지금도 나는 주식투자자가 아니며 다음 W의 버스를 올라타길 원하는 승차대기자 일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로 끝난게 아니다. 99년 말에 다행히 그걸 정리하고 수익을 남겼지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엄청난 수준은 아니다. 왜냐하면 월급 받아 생활하고 남은 돈으로 조금씩 적립한 것이기 때문이다. 티켓을 끊고 3등석이라도 타는 데 성공한 수준이랄까? 어쨌거나 작은 성과를 낸 다음 2000년에 올 새로운 버스를 기다렸다. 내가 유기물이 아니라 1%안에 들어가는 인간이 확실하다면 새로운 버스가 내 눈에 보여야 한다. 내가 창의적인 천재 즉 W가 아닌 건 잘 안다. 0.1%의 W를 보면 99%의 사람들이 돈키호테라고 부른다. 실제로도 그런 인간 중 99%는 돈키호테가 맞다. 그게 문제다. 1개 사단의 돈키호테가 있다면 1명만이 W이고 나머지 9999명은 진짜 또라이다. 문제는 안목을 가진 0.9%는 1개 사단 중에서 1명을 발견할 수 있는 통찰력과 직관을 가진 사람인 반면 나머지 99%의 사람들은 저것들은 모두 또라이라고 생각하고 1명의 W마저 끌어내린다는 것이다. 어쨌든 새로운 버스를 발견하지 못하면 나는 다시 99%의 유기물로 전락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뭐가 W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잉여인간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고민을 했다. 방법은 있다. 내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2000년 말부터 2001년 중반까지 과감히 또는 무모하게 백수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0개월간 놀면서 W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나보다 똑똑하고 많이 공부했고 내가 속하지 않았던 집단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밥 사주고 술 사주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내 머리가 안되면 남의 머리를 빌리면 된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정리가 되었다. 그 친구들 얘기는 이랬다. 2000년은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해이다. 왜냐하면 천년 이전에 새로운 천 년이기도 하고, 1900년 이후에 새로운 100년이기도 하고, 1990년 이후에 새로운 10년이 시작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날 것이고 모든 측면에서 다 바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오느냐? 산업혁명 이후에 200년간 인류의 문명이 급도약을 하게 되었는데 그 큰 힘은 기계였다. 문제는 기계가 문명을 건설했는데 인간이 기계의 주인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의 주인이 시대였다는 것이다. 이때 구호가 바로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였다. 무엇을? 기계를. 무엇이? 사람이. 기계가 혹시나 잘못될까 봐 기계의 안녕을 위해서 인간이 봉사한 것이다. 그 동안 인간은 석면을 들이마시며 쓰러지고 중금속에 오염되었다. 그게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대였다. 이 기계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가혹함도 있었지만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물을 기계가 가공하여 상품을 만든다. 그런데 더 이상 상품으로 기능하지 못하면 그때부터 쓰레기가 된다. 자연물의 상태로도 되돌아가지 못하는 비가역적이다. 이렇게 쓰레기는 쌓이고, 자연물은 소모되어 가는 엔트로피 증가는 결국 인류문명을 멸망으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자각이 2000년 이후에 나타날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이것을 자각한 일부 W들이 우리에게 핵심적인 키워드를 던져주었다. 바로 웰빙이다. 이게 W의 목소리인데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99%의 잉여인간들은 웰빙 좋지~ 하면서 다운쉬프트하러 내려간다. 하지만 W가 말하는 웰빙은 Well-Being 즉 잘 살자는 것이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잘 사는 시대이다. 핵심화두는 결국 사람이다. 이걸 시골에서 나물 뜯어먹으며 살아가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우주이고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서 시대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잉여인간이 될 수도 있다.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Q. 수많은 정보 중에서 어떻게 선별해야 하는가

A. 때에 따라서는 필요 없어 보이는 것도 다 필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이렇게 발달할 수 있었던 최대의 공로자는 레닌과 스탈린이라고 생각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빠져 죽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결국은 단계이고 진화의 과정이지 않을까 한다. 문제는 하나의 학문 속에서도 엄청난 정보량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아는 것이 바로 안목이고 직관이다. 내가 계속 강조하는 것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남보다 뛰어난 통찰과 직관을 갖고 싶다면 알아 할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략에 익숙지 못하고 풍부하게 들려주는 것에 그 동안 익숙해져 버렸다. 오감과 육감을 모두 깨워야 한다. 온몸의 감각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느끼고 생략과 절제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99개의 껍데기에서 1개의 알맹이를 찾아낼 수 있는 통찰을 거기서 키우게 된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예술과 문화, 사회,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것이 여러분들을 사유하게 하고, 생각을 모아 통섭하게 만든다. 그래야 다른 사람보다 앞설 수 있다. 여러분들이 전공을 열심히 하는 것은 모두가 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앞서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통찰이다. 통찰은 오감과 육감이 살아있어야 느낄 수 있다. 그러기 위한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야 기회가 여러분의 몫이 된다.

W는 다음 커뮤니케이션의 창업자 이재웅사장이고

백수는 깨비메일의 한이식사장

깨비는 라이코스 코리아에 인수되었고, 나중에 라이코스는 다음에 인수되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인간...

첫째, 안 아프고 오래 살아야 하니까 '의학', '약학'은 기본이다.

둘째, 건강을 증진해야 하니까 '헬스케어', '바이오'.

세번째, 인간을 즐겁게 만드는 '레저', '엔터테인먼트'.

넷째, 엔트로피 증가, 비가역적 생산물의 증가를 막아야 하니 '대체에너지'

다섯번째, 이미 늘어난 쓰레기를 줄여야 하니 '환경' '에코'

여섯번째,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 머리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지식산업'... 이정도가 친구들이 들여준 2000년에 등장할 새로운 변화였다.

앞으로 150년 후에 지구의 절반이 물에 잠긴다라는 얘기가 나오면 0.9%의 통찰력 있는 인간들은 이거 큰일났네, 그 해법을 가진 W가 누구냐, 빨리 찾아서 산업을 키우고 대비하자며 잽싸게 움직이는데 99%의 잉여인간들은 150년 뒤면 내가 죽고 난 다음이네 라고 생각하고 만다. 나는 의학계에 있으니 헬스, 바이오에 관심이 있었고 예전에 이루어놓은 작은 성취를 바이오벤처사업에 묻어두었다. 그 중 일부는 내년에 코스닥에 상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식산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을 보면 거대한 공장을 만들어놓고 수만 명의 근로자들이 일을 하면서 엄청난 화석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사업을 하여 하루에 벌어들이는 돈이 잘나가면 10억이고, 재수없으면 못벌 때도 있다. 하지만 파이낸셜센터 건물 하나에서 생기는 부가가치 크기는 그보다 열 배는 더 클 것이다. 백배쯤 될 수도 있다. 그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면서도 기계라고는 없다. 어느 층을 들어가봐도 책상 위에 화분 몇 개와 컴퓨터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기계문명시대에는 기계를 통해 부가가치를 생산한다. 이때 인간은 기계의 안녕을 위해 일하고, 거대한 공장의 부속품처럼 살아가야 했다. 왜라는 질문은 금기였다. 왜라고 질문하는 인간은 사회부적합형 인간 취급을 받았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직렬구조에서 일사불란하게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을 하면 아웃풋이 감소했고 그래서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사고방식은 잘 안되면 사람을 자르자이다. 이때 인간은 상수가 아니라 변수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서는 '왜'라는 질문이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왜'에서 출발한다.

GE가 제조업에서 금융으로 혁신을 했듯이 포스코도 마찬가지이다. 포스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계문명시대의 대표적인 기업이다. 그런 기업이 환경기업이 되었다. 파이낸스 공법이라는 것으로 연료비 15%~20% 절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조선소 기준으로 할당 받는 탄소배출량에서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포스코는 탄소배출권 시장에서 수익을 내게 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발생한 이산화탄소를 바다에 땅을 파서 묻기도 하고, 풍력발전과 조력발전에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가 Bird-view로 보아야 할 변화와 인식들이다. 과거에는 직렬구조였지만 지금은 병렬구조여야 한다. 그물코처럼 이어진 병렬구조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게 네트워크상에 서서 몸을 낮추고 같은 레벨에서 서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왜''왜''왜'가 뭉쳐서 거대한 창의성이 된다. 직결이 아닌 병렬, 수직이 아닌 수평. 이런 시대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과거에는 여기 아니면 저기에 있을 수 밖에 없지만 지금은 여기저기를 모두 가로지는 선상에 서기도 하고, 때로는 CEO처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는 반면 나 없다고 세상이 잘 안 돌아가는 상황도 없어졌다. 그래서 이런 시대를 Web 2.0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도 99%는 RSS나 위키피디아가 나타나 세상 좋아지고 있다는 상투적인 마인드로 생각한다. 하지만 1%는 사람들이 병렬로 이어졌을 때 그 병렬의 그물코 사이로 일어나는 수많은 '왜'라는 창의력들로 집단지성의 승리가 도래하는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너무나 명확하게 앞에 던져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한 이야기는 오늘로부터 뒤로 10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 상당히 고민에 빠져 있다. 2008년도 중반에 접어들었고 또 1년이 지나면 2010년에 접어든다. 분명히 누군가는 내가 여러분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 새로운 W를 들고 나올 것이다. 내 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고 내 생각이 닿지 못하는 곳에 생각이 미친 사람들이 지금 오늘 내가 한 이야기가 아닌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이야기를 들고 와서 또 뭐라고 주장할 텐데 내가 두려운 것은 그 사람 이야기가 돈키호테야라고 들릴까 봐 걱정스럽고 그게 안 보이는 것이 고민이다. 지금쯤이면 앞으로 10년 후의 W가 슬슬 실체를 드러내고 보여야 하는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마음고생이 심하다. 그 때문에 밤에 잠이 안 온다. 왜냐하면 이걸 못 보면 또 유기물이 되지 않는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올 여름부터 다시 사람을 만나러 다닐 것이다. 또 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과 판단을 빌려 지혜를 모아 다음 세상을 정리하여 담아가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나는 1%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다음 10년에 또 다른 뭔가가 튀어나올 것이라고 본다. 이런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서 내가 그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들을 경험해야 하고, 내가 몰랐던 세상에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뛰어들어야 한다. 나는 그거 모르는 거야에 그치지 말고 직접 들어가봐야 한다. 현대경영학의 아버지인 피터 드러커는 이런 무식한 말을 했다. 세상에 가장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가 제일 잘하려는 것을 더 잘하려고 하지 않고 잘 못하는 것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현대경영학에서는 송곳처럼 뾰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통섭을 이야기한다. 네가 알고 있는 기술이 단순한 테크닉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그것의 통찰과 직관을 키워주기 위해서 네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알고 그런 생각들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네가 하는 일을 Bird-view로 내려다볼 수 있는 큰 통찰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게 통섭의 시대이다.

여러분들은 지금 나보다 훨씬 많은 고민에 빠져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40대 중반이니까 아님 말고, 어차피 폼나는 유기물이니까라고 안주해도 그만이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들은 자기 생에서 내가 꿈꾸고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실제로 실행해 볼 수 있는 처음 단계에 막 발을 들여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20대에는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단계이고 30대에는 그 준비된 것을 가지고 실행하는 것이고 40대는 실행된 것을 지키는 것이다. 40이 넘어서 무엇인가를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공자는 40을 유혹이 없는 나이, 불혹이라고 불렀다. 30에 실행하지 않으면 40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20에 준비하지 않으면 30에 실행할 수 없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하루하루가 미래의 생을 결정하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가만히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진저리가 날 정도로 현재의 모습에 대해서 자각을 해야 한다. 먹고 살만한 정도는 되는 그런 나도 앞으로의 10년을 고민하며 사람들을 만나러 다닐 각오를 하고 있는데 하물며 여러분은 내가 앞으로의 W가 무엇이 될 것같냐고 물으면 거침없이 손을 들어 내 생각은 이러이러하다면서 2시간은 떠들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문을 하고, 최소한 그 준비를 하기 위해서 치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각과 자기애가 필요하고 철저하게 자기를 믿어야 한다. 나를 아끼고 사랑하면 자기 안에 있는 창의성, 버려진 재능,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그 안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고 그것이 어쩌면 시대의 주인으로 나를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생각들이 여러분의 미래를 만든다.

지난해 타임지의 표지모델이 바로 'You'였다. 의미심장한 것이다.

W는................ 다음 커뮤니케이션의 창업자 이재웅 사장

백수는............ 깨비메일의 한이식 사장

깨비는 라이코스 코리아에 인수되었고,

나중에 라이코스는 다음에 인수되었다.

그리고 다음은 카카오톡에 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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